메르스 위기와 마을공동체의 가치
현대사회를 위기의 시대라고 한다. 기후변화에 따른 잦은 재해의 발생은 일상의 안전을 위협하고 있고, 화석연료 등 무분별한 채굴과 남용은 자원고갈과 에너지 위기를 낳고 있다.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사고는 현대사회가 직면한 끔직한 위기의 단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로부터 촉발되었던 세계금융위기를 겪으면서 우리는 새삼 깨닫게 되었다. 오늘날의 고도화된 세계경제체제가 평범한 우리 민초들의 삶의 욕구를 풍요롭게 채워줄 수 있는 재화가 아니라 한순간에 개개인의 삶의 피폐하게 만들 수 있는 재난이 될 수 있음을... 지금까지는 성장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 것이라는 경제성장의 신화가 공고했었고 실제로 경제성장의 달콤한 열매를 맛본 이들도 많았다. 그러나 지구환경과 인간 자신을 착취하면서 만들어진 성장 신화는 결국 생태, 경제, 사회, 전 영역에 걸쳐 만성적인 위기를 만들었을 뿐이다.
만성적 위기에 봉착한 개인들은 극단적 선택에 내몰리게 된다. 한국은 10년 넘게 OECD회원국(34개)가운데 자살률 1위의 불명예를 기록하고 있다. 하루 평균 40여명이 자살을 선택하고 있고 전체 사망원인 4위, 10-30대 사망원인 1위가 자살이다. 자살의 가장 큰 원인은 경제적 가난이다. 그런데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생활고를 비관한 가족동반 자살이 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더 이상 사회가 개인의 곤경을 염려해 주고 도와줄 거라는 기대가 사라졌음을 나타낸다. 실제로 최근 OECD가 발표한 <2015 더 나은 삶 지수>에 따르면 한국은 OECD 국가 중 ‘사회적 연계’ 부문에서 최하위다. 쉽게 말해, 힘들 때 기댈 사람이 없다는 뜻이다. 자기가 죽고 나면 남은 가족을 아무도 돌봐주지 않을 거라고 믿기에 가족을 데리고 세상을 떠나는 것이다. 생명의 사회적 연계성은 사라지고 각자도생의 개체성만 남은 우리사회의 비참한 실상이다.
각자도생의 비참한 처지에 빠져있음을 우리는 지금 메르스 사태를 통해 극명하게 경험하고 있다. 정부의 늑장대응, 컨트롤타워의 실종, 국정 최고책임자의 소통의지 부재 등 세월호 참사에서 보았던 정부의 무능이 그대로 다시 반복되고 있다. 최단기간에 이룬 근대화의 기적을 만들어내었던 관료시스템과 국가리더십, 세계에 자랑할 만한 첨단 IT경제를 일구어낸 우수한 인재와 경제력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날 한순간 사막의 나라 중동에서 묻어온 미지의 바이러스 한방에 온 사회가 패닉상태에 빠져버린 것이다. 왜 그렇게 무기력하게 되었을까? 그 비밀은 바로 한국사회의 공공성 상실과 신뢰의 부재에 있다. 공공성 상실과 신뢰의 부재는 우리 사회를 좀먹는 가장 무서운 바이러스이다. 사회공공성이 낮은 국가는 신뢰수준도 낮다. ‘함께 살자’는 연대의 공동체 의식 대신에 ‘나만 살자’는 각자도생과 이기심이 판치게 된다. 시장만능주의 사회에서 메르스 사태를 맞은 지금의 우리나라가 그런 모양새다.
최초의 메르스 환자는 병명을 몰라 3곳을 전전하다 삼성서울병원을 찾았고 진료를 담당한 의사가 메르스를 의심해 질병관리본부에 2차례나 메르스 확진검사를 요청했지만 12가지의 다른 호흡기질환 검사를 권고하며 거부하여 결국 메르스 초기대응이 늦춰지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또 확진 이후에도 감염확산을 막기 위한 적극적 조치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제2, 제3의 슈퍼 전파자를 방치하여 사태를 걷잡을 수 없는 국면으로 몰아넣었다. 자신이 책임져야 할 부분을 서로 떠넘기고 불신이 또 다른 불신을 낳는 악순환이 반복된 것이다. 감염병 예방을 위한 충분한 격리시설의 확보와 같은 공공성보다는 더 많은 환자수용과 편의시설 확보와 같은 경영상 이익을 앞세우는 병원의료문화는 메르스와 같은 재앙을 키우는 숙주가 되었다. 또 의사와 환자 사이가 인간적으로 서로 믿는 신뢰관계가 아니라 마치 물건을 구매하기 위해 쇼핑을 하듯 여러 병원을 전전하게 만들며, 사실을 얘기했다가는 진료를 거부당할까 염려하여 거쳐 온 병원을 숨기는 이런 만연한 불신 풍조가 역병을 확산시키는 좋은 환경이 되었다. 결국 공공성에 대한 무책임과 사회적 불신이 호미를 막을 일을 가래로도 막지 못하는 상황을 가져온 것이다.
그런데 이런 공공성 부재와 신뢰 상실보다도 더 무서운 사회현상을 이번 메르스사태의 와중에서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사회적 분열과 편가름에 편승한 분노와 저주의 문화가 우리사회에 팽배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진보 성향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산소호흡기에 의지해 메르스와 투병중인 35번 의사 환자에게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막말을 퍼붓는 글이 올라와 논란이 되었었다. 정부와 삼성병원의 늑장대응과 비밀주의를 폭로한 박원순 시장을 비난한 35번 의사 환자가 생명이 위중한 상태를 맞이하자 병에 걸린 환자의 쾌유를 빌기는커녕 ”입건방 함부러 떨면 안된다는 걸 반면교사로 보여주는거 같습니다”와 같은 글이 올라오고 그 글은 두시간만에 조회수 6만9천회를 기록하면서 환자의 상태 악화를 반기고 저주를 퍼붓는 댓글이 이어졌던 것이다.
인간의 생명보다 앞서는 진영논리가 만연하고 있는 우리 사회는 분명 메르스보다 심각한 역병을 앓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여기에는 함께 이 시대를 살아가는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어쩌면 자신의 이웃으로 생활하고 있을지도 모를 상대방에 대한 인식이나 염치를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상대방의 생각이나 의견이 서로 다를 때 그것을 역지사지 해보고 이해해보려는 노력을 하기에 앞서 상대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기 싫고 참을 수 없어하는 병적 증상이 확산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사회를 통째로 해체해버릴 수도 있는 가장 큰 위기로 몰아넣는 역병이다. 이 역병을 이겨낼 면역력을 길러야 한다. 그것은 상생의 유전자를 무한복제하고 공동체 속에서 숙성시키는 것이다. 서로 소통함으로써 상호 존재를 인정하고 관계맺음을 발전시켜 성숙을 꾀하도록 하는 것이다.
무능한 정부와 탐욕스런 시장의 힘만으로는 이룰 수 없는 공공성과 사회적 신뢰의 회복을 통해 상생의 시민문화를 만들고자 하는 것이 마을공동체운동이다. 마을공동체정책에서 중요한 것은 그를 통해 이루어지고 성취되는 이러저러한 사업적 성과 그 자체가 아니다. 오히려 사업의 과정에서 참여하는 사람들 사이에 형성되고 성숙되어가는 시민의 힘과 내용이 핵심이다. 사업의 참여 과정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욕구와 의견을 드러내게 되고 서로 다른 처지와 생각을 가진 이웃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소통하며, 공동의 기획과 실행과정을 통해 갈등을 중재하고 다양성을 조화시키는 태도와 기술을 배우게 된다. 바로 이것이 시민의 힘, 시민성과 자치력을 키우는 마을공동체운동의 본질이다.
상생의 공동체가 미래적 지향에 그치지 않고 현실적 역동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실사구시적으로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는 실제적 방법과 시스템을 구축하고 영향력을 확장해나가야 한다. 이번 메르스 사태와 같이 정보의 독점과 소통의 부재로 막연한 공포가 확산될 때 매르스맵과 같은 집단지성을 적용한 정보의 공유와 여론형성을 통해 당국의 태도를 변화시키고, 공공보육 및 교육기관이 휴업하며 대책없이 책임을 개인들에게 떠넘길 때 커뮤니티공간에서의 동네돌봄과 같은 작은 대안들을 만들어나가며, 중앙정부의 무능으로 대책없이 위기가 확산되고 있을 때 그를 보완할 수 있는 지방정부의 권능확대와 협업시스템을 구축해나가는 등 발전적인 대안들을 시도하고 현실화시켜나가는 노력들이 꾸준히 이어져야 한다.
사이좋은 이웃끼리 믿고 사는 마을, 그것이 우리가 행복한 삶을 꿈꿀 수 있는 바탕이다. 사익이 무시되거나 배제되지 않지만 공공성이 점차 높아지는 사회, 사회적 유대와 끈끈한 정으로 엮어져 있지만 밖으로도 편견없이 열려있는 공동체로 발전하길 원한다. 돈과 물질 위주로 욕망하는 데로부터 사람과 생명을 중심으로 조화시키는 방향으로 문명의 흐름을 전환할 시대적 요청에 직면해 있다. 점점 빈도와 심도를 더해 가는 재난과 이변 또한 우리에게 그것을 깨닫게 해 줄 기회가 감추어진 위기임을 깨다를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때문에 소통과 영성의 정치, 돌봄과 상생의 경제, 모심과 살림의 문화, 생명과 평화의 사회를 추구하는 <개벽>의 제안은 오늘 우리에게 진실한 울림을 주고 있다.
박홍순(마을만들기전국네트워크 공동운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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