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홍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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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86세대의 소회
노장청(老壯青)세대 간 조화를 추구하고 서로 도와 미래를 준비해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이 글은 “근대의 가치와 한국의 이념 지도”란 주제로 한국사회를 연찬하는 50대들의 대화모임에 참여하면서 생각해봤던 것들을 거칠게 정리한 글입니다.
한국사회는 이른바 ‘압축적 근대화’과정에서 배태된 ‘비동시성의 동시성’으로 인해 많은 혼란과 갈등을 겪고 있습니다. 최근에 이른바 ‘조국사태’를 둘러싼 사회적 갈등은 농염이 짙어지고 복잡하게 얽혀있는 그 실태를 확실히 보여주며 우리 모두를 각성하게 할 수 있는 소재로도 될 수 있습니다. 기왕이면 비관적인 측면보다는 낙관적인 측면에서 문제를 바라보면 좋겠습니다.
이른바 ×86세대로 불리우는 우리 세대는 ‘민주화의 추억(?)’을 공통의 기억으로 갖고 있습니다. 우리 윗 세대가 전쟁과 분단의 트라우마, 그리고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를 공유하고 있다면 우리 세대는 “잘 살아보세”의 피땀을 자양분으로 해서 머리 속에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가슴 속에는 “학우여, 들리는가? 민중의 목소리”를 새기며 청춘을 불살렀던 기억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민주화의 추억에는 명암이 같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자유와 제도적 민주주의가 그 밝은 면이라고 한다면 어두운 면은 이른바 좌경화혁명운동에의 투신과 그 후과입니다.
그 열정과 결단이 치열했던 만큼 그것이 개인과 사회에 남긴 상처와 여진은 깊고도 넓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갈등과 혼란도 그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보다 솔직하게 과거를 마주하고 용기있게 얘기할 수 있었다면 그 갈등과 혼란은 훨씬 줄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 청년세대의 요구와 ‘공정’의 보편화
청년이 우리 공동체의 미래를 책임질 세대임도 분명하지만 노년이 단순히 흘러 간 과거 세대가 아니듯이 청년 또한 현재 우리사회의 다양성을 구성하고 있는 중요한 한 부분입니다.
진보운동을 하고 있는 한 청년의 인터뷰 내용을 들여다봤더니 오늘날 우리사회의 현실을 영화 ‘헝거게임’에 비유하면서 “이 잔인한 게임을 멈추지 않는 한, 다음 차례는 나 자신이 될 것이다.”라는 자각으로 운동을 한다고 하더군요. 높은 자살율과 낮은 출생율이 보여주고 있듯이 청년들이 우리사회를 “헬조선”이라고 표현하는 것도 이해가 갑니다. “부디 다들 알아서 행복하자...” 이 얼마나 슬픈 우리시대의 자화상입니까?
오늘날 청년 세대들은 위계가 명확한 공동체 문화나 다양성이 인정받지 못하는 것을 못견뎌합니다. 개인이 공동체를 위해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취약한 개인이 연결되고 보호받을 수 있는 방식을 원합니다. 그들은 개인주의가 공동체를 구원할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어떤 개인도 위험에 처하지 않게 하는 것, 누구든 주체가 되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하고 자신들이야말로 오히려 협력하고 협업하는 데 열려있는 세대라고 자부합니다.
오늘 날 청년 세대가 보편적으로 공감하고 요구하고 있는 것은 ‘개인의 자유 확대’와 ‘공정의 실현’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앞선 세대가 이룩한 근대화(물질적 풍요와 정치적 자유)의 토양 위에서 꽃피는 요구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지혜가 필요한 지점입니다. 청년 세대가 노년 세대나 장년 세대의 연장선 상에 있으면서 앞의 두 세대와 확실히 다른 점은 개인과 국가사회공동체와의 관계에서 명시적으로 개인을 우선시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근대화 과정 이후의 우리 사회의 과제로 정신적 측면(의식문화적 측면)에서의 각자도생(各自圖生)의 이기주의와 물신숭배의 극복, 제도적, 경제적 측면에서의 양극화, 이중화의 극복이라고 한다면, 청년 세대의 위와 같은 요구가 점차 보편적인 사회적 요구로 되어 가고 있는 것은, 특히 사회적 정의의 실현 - ‘공정’의 과제가 날로 심각해져 가는 양극화, 이중화의 문제와 맞물려 사회적공감대를 확대해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 문제를 생각할 때 저는 “정의와 용기는 젊음의 생명”이라는 젊은 시절 즐겨 부르던 노래가사가 생각납니다. 이 때의 정의는 올바름, 곧음, 의로움 이라는 의미가 강했습니다. “무릎꿇고 살기보다 서서 죽기 원한다”라는 노래도 즐겨 불렀죠. 이 때의 ‘정의’는 ‘선비정신’으로 표현되는 동양적 철학전통과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청년 세대가 얘기하는 ‘정의’는 영어로 치면 fairness나 equity에 가깝습니다. 공정과 공평, 서양 아리스토텔레스철학의 전통에 이어져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도 지난 3~40여년 동안 한국 사회는 확실히 시장경제에 기반한 대표적 근대국가-서구에서 출발해서 지구적으로 확대된-의 보편성을 갖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서양에서 유래한 근대적 자유시민은 시장과 상업활동의 과정에서 국가로부터 독립된 위상의 확보, 사유재산의 보장, 법 앞의 만인의 평등 등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좀 단순화의 위험성을 무릎쓰고 말한다면 ‘정신’보다는 ‘돈’이, 선비나 수도자의 권위보다는 상인의 지혜가 더 중요해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근대의 자유시장은 양면성이 있습니다. 부정적 측면은 물신화(物神化) - 맑스철학의 기본 문제의식이 되었던 것이죠. 유물론에 기반한 맑스의 해법도 결국은 물질 중심의 사고와 한계를 넘어설 수 없었습니다. 긍정적 측면은 근대인의 자발성과 자유의 토양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부정적 측면을 극복하고 긍정적 측면을 토대로 어떻게 하면 한 단계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갈 것인가 하는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 개인주의를 넘는 새 지평
직면한 문제를 풀고 미래를 개척해나가는 길에서 저는 긍정적 측면을 주로 하여 낙관적 관점에 서는 것을 선택하고 싶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오히려 우리 사회에 혼란을 극복해갈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진 것이다.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새로운 시작점들이 우리 안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물질적 발전의 측면에서도 개방과 경제성장을 통해 절대빈곤으로부터 탈출했고, 의식주 생활전반에 걸쳐 풍부한 생산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개인의 발견이란 측면에서도 평범한 직장인들 사이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라는 책의 제목이 보여주고 있듯이 어떤 권위나 사회적 억압으로부터도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자유인들이 넘쳐흐르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역사에 비약은 없고 근대의 성숙조건을 채우지 않고는 더 새로운 사회로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학창시절 학과사무실 벽면에 걸려있던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4자성어가 떠오릅니다. 물의 특성은 만물을 키워주지만 그 공을 남과 다투지 않습니다. 항상 낮은 곳에 임하여 결국 큰 바다를 이룹니다. 물은 바다를 향해 흐를 때 아주 작은 구덩이가 있어도 그것을 다 채우면서 기다렸다 흐름을 계속 이어갑니다.
개인주의의 한계를 극복한다는 것은 개체를 넘어선 공동체의 통합성, 즉자적 이해관계를 넘어선 숙의성, 철인왕에서 말하는 통찰력을 추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통합성, 숙의성, 통찰력이 자칫 높은 추상적 수준이 가져오는 애매함과 개체를 넘어 형성된 권위로 말미암아 현실에 실존하는 개인의 자유와 창의와 역동을 억압할 수도 있다는 점을 항상 염두에 둬야 합니다. 그것은 전문성에 의존하는 앨리트주의나, 더 우수한 비교우위를 겨루고 선택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의 물질적, 과학적 발전의 결과로 만들어지는 공유기반과 고도의 사회적 신뢰성의 토대 위에서 집단지성을 통해 함께 만들어가는 단계로 진화해야 합니다.
개인에게 엄청난 양과 질의 수련(도닦기, 학습)을 요구하지 않고도 웬만한 것은 저절로 가능해진 토대를 갖게 된 사회, 낚시하고 놀이를 하고 있어도 생산력이 담보되는 사회, 국가폭력과 저항폭력이 현저하게 줄어들어 소멸해 가고 생활폭력(언어폭력 포함)의 조정능력이 향상되고 있는 사회, 우리는 이 얼마나 좋은 신세계에 살고 있습니까? 과학자들에 의하면 복잡계의 사회에서는 인위적 질서보다는 자생적 질서가 더 생명력을 갖는다고 합니다. 과학이 고도로 발전하고 사회가 엄청나게 복잡해진 오늘 현대사회에서 자율과 조화가 더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개인주의를 넘어 공동체로 나아가는 길은 중용(中庸)의 길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현실사회에서 중용의 길은 결코 만만치 않은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현재 한국사회는 공동체를 위한 희생과 헌신이 조롱받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그래봤자 너만 손해야”라고 손가락질 받기 십상입니다. 철학자 윤평중의 표현을 빌리자면 “원자화된 개체와 미성숙한 공동체가 엉겨붙어 이성적 주체의 출현과 사회적 합리화가 지체되는 형국”입니다. 건전한 시민정신, 성찰적이고 책임있는 시민주체의 등장이 필요합니다. “공동체의 가치를 포용하면서도 개체의 중요성을 앞세우고 좋음의 중요성을 시인하면서도 옳음의 정립을 선결하는 것”은 현 단계 우리가 함께 취할 수 있는 중용의 지점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중도(中道), 중용의 길을 추구하는 것은 헛된 꿈이 아닙니다. 실사구시적 태도와 끊임없는 연찬의 힘으로 확대가능한 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 이상주의적 지향과 사이 넘어
앞에서 민주화 세대의 양면성 중 어두운 측면으로 좌경혁명운동의 후과를 언급했었는데요 그 자체에도 양면성이 있습니다. 암(暗)이 아니라 명(明)의 측면에서 보자면 그 노력의 헌신자들이 추구했던 현실모순의 극복을 위한 근본주의적 모색의 측면이 그렇습니다. 크게 보면 근대를 넘어서기 위한 문명사적 전환, 철학적 실천의 모색이기도 했다는 점입니다.
그러한 청년 ×86세대들의 몸부림은 90년대 중반 이후 현실의 자각 속에서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 시작합니다. 그 중에 일부는 현실정치로 흡수되어 들어갔고 또 다른 일부는 공동체운동 등 새로운 운동의 모색으로 투신합니다.
물론 기성 세대가 이미 역사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증명된 사실들을 외면하고 자기만의 미망에 사로잡혀 철지난 레코드를 틀어대고 있는 것은 정말 우습고도 볼썽사나운 일이 됩니다. 하지만 적어도 청년 세대들의 이상주의적이고 혁명적인 사고와 시도들을 이해하고 용인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기성질서의 관성적 틀에 가두어 두려고만 해서는 안 됩니다. 이미 우리 앞에 바짝 다가온 가까운 미래의 과제를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세대를 넘어 인류의 공동 운명을 좌우하는 문제로 되고 있습니다. 기후변화와 같은 지구생태계와의 공존 문제, 인공지능이 인간을 뛰어넘어서는 특이점의 도래와 같은 과학기술발전과 인간의 통제 능력 간의 모순해결을 위해 우리는 힘을 합해야만 합니다.
진영을 넘어 세대 간의 대화가 절실합니다. 오픈된 자세로 열린사회를 이루어야 합니다. 관용의 정신과 역지사지(易地思之)의 태도가 필요합니다. 수평적 대화토론으로 “누가 옳은가?가 아니라 무엇이 옳은가?”를 함께 찾아가는 연찬의 관점이 필요합니다. 제가 일하는 곳에서는 요즘 ‘안녕하세요 내가먼저‘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데 내가 먼저 손을 내밀어 상대방의 손을 잡는 실천이 필요합니다.
장강은 뒷물이 앞물을 밀어내며 흐릅니다. 그것이 자연의 순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