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9월 14일 월요일

새로운 민주주의 토론문(2020.8)

새로운 민주주의(3세션) 토론문 
 박홍순 

 ※ 이 토론문은 구자인 박사의 발제문, 즉 풀뿌리 마을공동체운동, 자치분권 민권협치 정책의 혁신과제를 중심으로 작성하였다. 이와 함께 본 컨퍼런스의 대주제인 새로운 민주주의에의 모색이라는 측면에서 지역의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라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한국 민주주의의 활로에 대해서도 조금 생각해보았다. 


 #장면 1 2004년, 여름 어느 날, 수유리 아카데미 하우스, 전국의 마을만들기 현장활동가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그간의 한국 마을만들기운동을 돌아보고 앞으로 나아갈 길을 내다보기 위해서였다. 때마침 정부의 국가균형발전 지역혁신정책이 시작되던 때라 그에 대한 현장의 목소리를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함께 토론했던 한 분이 오늘의 발제자이다. 구자인 박사는 농촌 지역현장의 생생한 목소리와 지난 20여년 간의 실천경험을 갖고 이야기하고 있다. 현장으로부터의 호소력과 무게감이 전해진다. 다음 그림은 당시 발제문에 실려있던 지역공동체마을만들기 개념도이다.  


○ 구자인 박사는 발제문에서 행정이 주민에게 진짜 권한을 이양한 적이 있는가? 민간 스스로 성장할 기회를 준 적이 있는가? 라고 묻고 있다. 맞다. 행정은 진정으로 그리하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좌절과 실패, 마을의 붕괴와 농촌 소멸을 목도하고 있다. 그것은 정책의 실패요 국가의 실패, 그리고 시장의 실패, 나아가 시민사회의 실패(풀뿌리주민자치운동을 포함해서)이다. 
 ○ 그동안 정부의 지원정책은 보조사업에 줄서는 민간단체를 양산해내었다. 지방으로 갈수록, 농촌으로 갈수록 행정의 깔대기 공급에 줄서기하는 것이 민간시민사회의 숨길 수 없는 민낯이다. “지역경제의 8~90%는 결국 그 소스가 관이다”라는 세간의 말이 지어낸 말만은 아닐 것이다. 
○ 대부분의 읍면지역이 초고령사회에 접어들었고 외형적 마을이 아닌 내부적 마을-공동체성은 상당부분 훼손되었고, 주민의 자치역량은 취약하다 행정정책의 속성은 주민의 성장과정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외부로부터의 변화 속도가 내부의 회복력, 지속가능성을 압도하고 있다. 
○ 물론 작은 희망들도 발견할 수 있다. 귀농귀촌은 꾸준히 늘고 있고 청년들의 정착사례나 지방자치단체의 우수정책사례들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우수사례는 안 보이는 물밑에서 뛰어난 헌신자들의 고군분투와 땀과 눈물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예외적 경우가 대부분이다, 전반적으로 자치와 협력의 생태계가 너무 취약하다. 민관협치, 거버넌스 문화가 취약하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치분권과 균형발전, 거버넌스가 강조되고 명목상으로라도 국가의 정책으로도 중요시되고 있는 것은 그것이 방향이고 대세임을 보여주고 있다. 좌절만 하고 포기할 수는 없다. 그러기에는 지난 20여년 간의 노력과 수고가 너무 아깝지 않은가? 20년이 한 개인이나 특정 정치그룹에게는 길다면 긴 세월일 수 있겠지만 인류역사의 큰 흐름, 그것까지는 아니더라도 한국민주주의의 전환이라는 관점에서는 아직 초입단계에도 이르지 못한 작은 시간이다. 
 ○ 구자인박사는 정부 관련 정책의 혁신과제로 - 중간지원기관에게 권한과 자율성 부여 - 관료주의를 타파하고 갑을관계를 끊어낼 것 - 조급주의와 성과주의를 넘어설 것 - 칸막이식 정책사업의 통합조정과 연계협력 - 민간현장전문가 공직채용과 좋은 일자리 만들기 를 들고 있고, 자치계층에 맞는 집중 전략과제로 - 시군구는 민관협치-중간지원조직 - 읍면동은 주민자치회 - 리단위는 마을자치회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또 생활권단위(읍면동)에서의 정책융·복합이 필요하다고 강조하는데 그것을 가능케 하려면 그 단위에 그에 합당한 권한과 재원이 부여되어야 한다. 
○ 이러한 구자인 박사의 제안은 지난 15여년 간의 마을만들기, 지역혁신, 자치분권, 민관협치의 현장에서 땀흘려본 사람이라면, 그 현장에 애정을 갖고 실사구시적으로 정책을 접근했던 정책담당자나 연구자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내용들이다. 누차 강조되어왔지만 정부의 정책지원에서 중요시 할 것은 사업자체의 성과가 아니라 지역사회의 인재육성과 역량강화이다. 

 ○ 발제자와 비슷한 영역에서 지난 20여년을 활동해온 토론자도 지역이 대안이라는 희망을 아직 버리지 않고 작은 힘이나마 현장을 지키려하고 있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실마리를 풀어야할지? 우리 사회의 실태를 보고 있자면 점점 더 코로나블루와 같은 심리상태에 빠져듦을 숨길 수가 없다. 우리 사회에 대한 깊은 통찰과 혜안으로 울림을 주고 있는 남곡 선생님의 생각을 빌어 우리 사회가 봉착한 문제와 헤쳐나갈 활로에 대해 조금 접근해보려고 한다. 
 ○ 지금 우리사회는 점차 헤어나기 힘들어지는 깊은 늪으로 빠져들고 있다. 그 늪은 ‘과거’라는 늪과 ‘진영’이라는 늪이다. 요즘 각종 여론매체 등 우리의 시민사회와 정치문화의 상태를 보면 심리적 내전 상태라고 할 만큼 분열과 분노 그리고 증오가 심각하다. 
 ○ 이 내전은 총칼이 아니라 주로 ‘말’을 무기로 하고 있다. 그나마 총칼이 바로 무기로 나오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위안을 삼아야 할까... 우리 속담에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라는 말이 있다. 말은 분명히 한계가 있다. 위선이 되기 쉽다. 내로남불이 되기 쉽다. 특별히 악한 사람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누구나 빠지기 쉽다. 
 ○ 고정불변하는 것은 없다. 그래서 무상(無常)이라고 한다. 분리독립된 것은 없다. 그래서 무아(無我)라고 한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는 바탕에서 과거라는 늪을, 제법무아(諸法無我)라는 바탕에서 편가름이라는 늪을 통과해야하는 것이 우리가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큰 길이라고 본다. 
 ○ 선입견, 도그마, 신념체계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이 바른 견해(正見)이다. 어떤 과정을 통해 정견에 이르는가? 자기 감각과 판단을 통해서 탐구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 그 자각을 유지하는 것이 공공(空空)의 의미이다. 자기 생각은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늘 자각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 생각과 다른 생각에도 열려 있는 상태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누가 옳은가가 아니라, 무엇이 옳은가를 향해 함께 서는 것이다.  
○ 중도는 이 늪에서 벗어나 실사구시(實事求是)하고 구동존이(求同存異)하는 길이다. 지금 우리가 당면한 현실적 어려움을 극복하는데 가장 필요한 것은 실사구시의 유연(柔軟)함과 구동존이의 연대(連帶)이다.이것이 현시기 진보를 판별하는 중요한 기준이라고 생각한다. 
○ 중도(中道)는 역동적인 균형추에 비유할 수 있다. 인류의 역사는 마치 괘종시계의 시계추처럼 끊임없이 좌우의 양극단으로 요동쳐오면서도 가운데로 수렴되어 온 역사이다. 지난 세기 사회주의 대 자본주의의 대결만 해도 그렇다. 다만 민주주의가 발전하면서 총칼로 죽이는 대신 말이 무기로 되고 있다는 것이 나아졌다면 나아진 것일까? 
○ 민심(民心)이 집단지성에 의해 의식의 보편적 진화로 나아가기를 기대해 본다. 인간이라는 종(種)의 특성으로 볼 때 그 존속과 번영, 자유와 행복의 가장 믿음직한 보루(堡壘)는 집단지성의 진화(질적 도약)가 아닐까? 문명전환은 이 각자에게 있는 균형추가 집단지성으로 진화할 때 그 모습을 나타낼 것으로 본다. 
 ○ 근대 민주주의의 이념은 자유와 평등, 박애이다. 대체로 자유를 강조하는 것이 보수우파, 평등을 강조하는 것이 진보좌파다. 자유와 평등은 그 특성상 서로 모순과 갈등이 발생할 수 있다. 하지만 하늘을 나는 새도 양 날개로 균형을 잡아 앞으로 날아갈 수 있듯이 서로를 동반자로 삼아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온고지신(溫故知新 : 옛 것을 익히고 새 것을 안다)의 지혜가 필요하다. 보수를 온고, 진보를 지신으로 삼아 좌우의 양 날개로 균형을 잘 잡아야 한다. 
 ○ 당장 눈에는 잘 안 띄지만 균형을 잡을 수 있게 만드는 토대, 앞으로 함께 나아갈 수 있게 만드는 원동력이 바로 박애(博愛)가 아닐까? 생각한다. 박애에 대한 해석도 시대와 사회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지만, 지금까지 가장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예수의 사랑, 석가의 자비, 공자의 인(仁)이 아닌가 한다. 이렇게 인류보편적인 형제애, 연대감, 이웃과 공동체에 대한 책임성 등이 위기마다 고비마다 분열과 역경을 딛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다. 
 ○ 공자는 ‘극기복례(克己復禮)가 인(仁)을 행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극기복례(克己復禮)라는 말을 현대적으로 이해하면 ‘아집을 넘어서서 사람들과 사이좋아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곧 ‘개체성을 넘어서 사회성을 갖추는 것’이다. 지금 시대에 연고(緣故)주의는 진정한 사회성이라고 볼 수 없다. 
 ○ 토론자는 코로나블루와 같은 늪에서 빠져나오는 길은 긍정적 측면을 먼저 보고 낙관적 자세를 견지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 사회의 형국은 사이비 보수와 모지리 진보가 쌍끌이로 나라를 위기로 끌고 가는 상황이라고 말한다. 또 포퓰리즘의 득세가 정상적인 민주주의를 퇴행시키고 있다고 말한다. 맞다. 
 ○ 하지만 우리 사회는 촛불의 힘으로 상징되는 시민사회의 성숙한 저력을 갖고 있다. 전후 최빈국에서 이제 당당히 원조를 줄 수 있는 놀라운 한강의 기적을 만든 나라이다. 코로나19 상황에서도 K-방역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냈다, 드라이브스루와 같은 거버넌스 관점의 대응과 성숙한 시민의식, 지방정부의 선제적이고 적극적인 대응 등은 살려나가야 할 장점이다. 
 ○ 미래사회를 준비할 수 역량들과 가능성들을 키워가야 한다. 우리 젊은이들 문화체육분야에서 세계적 인정을 받고 있는 것이 어디 몇몇 특출난 예외에서 비롯된 일일까? 우리 젊은 세대 개개인의 자유롭고 창의적인 분위기와 세계화된 감각이 보편화되지 않았다면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다. ICBM(IoT, Cloud, Big Data, Mobile)과 디지털트윈으로 표현되는 새로운 과학기술조건과 사회문화 환경을 개척할 수 있는 가능성도 이러한 젊은 세대들의 긍정점을 집단지성의 도약으로 연결되도록 자리를 깔아주는 기성세대들의 책임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끝)

 * 이 글은 거버넌스센터, 자치분권위원회, 수원시,서울시립대, 한국일보 등이 공동주최한 "자치분권과 지역혁신 : 새로운 민주주의의 길" 컨퍼런스 제 3세션 토론문으로 작성된 글이다. 컨퍼런스는 코로나19상황으로 연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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